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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박문수(朴文秀)이다. 전설 같은 인물로 여길 수도 있지만, 현재와 미래에 백성들에게 방향감을 주는 실존 인물이다.
박문수는 고령박씨로 조선 경종 때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그 후 병조정랑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 분무공신에 책록되어 영성군에 봉해졌고, 1730년 호서어사(湖西御史)로 출동하여 기민 구제에 힘썼으며, 1741년 어영대장으로 있으면서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다가 기민을 구제했다.
이런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는 과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박문수는 부모가 결혼하여 30대가 되어도 자식이 없자, 아들을 낳겠다는 일념으로 부처님 100일 기도를 발원하였다.
어떤 스님이 찾아와 “절에서 기도하지 말고, 집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만 생각하고 기도하라”라고 하여 집에서 기원하였다. 그는 1691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을 문수보살 이름을 인용하여 ‘문수(文秀)’로 작명하였다고 한다.
박문수는 무럭무럭 성장하여 유학(儒學)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과거시험 일정이 알려지자 박문수는 한양으로 직행하였다. 안성 칠장사에 이르러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당시 칠장사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의 기도처로 유명했다. 박문수는 어머니가 준비해 준 과자류와 조청을 나한전에 올리면 “과거급제”를 기원했다.
기도를 마친 박문수는 그날 잠자리에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어떤 노인이 다가와 “어디로 가는 길이냐”라고 묻기에 “나는 과거 보러 간다”라고 하자, 노인이 말하기를 “이런 정신 나간 사람 봤나! 이틀 전에 끝났어!” 깜짝 놀란 박문수가 물었다 “그럼 시제가 뭣이었나요?”
그 노인이 말하기를 ‘낙조(落照)’라고 하면서 위 시를 읊었다. 그런데 마지막 구절은 “자기가 잊어버렸다”라며 사라졌다.
꿈에서 깨어난 박문수는 정말 과거시험 끝난 줄 알았다. 많은 응시생이 칠장사에 함께 있음을 알고, 다시 한양으로 이동하여 과시(科試)에 응시했다. 그 당시 시제가 바로 “落潮(낙조)”였다.
落照(낙조) - 朴文秀(박문수)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지는 해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빛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찬 까마귀 흰 구름 사이로 날아 가네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나루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閒(심사귀승장불한) 절 찾는 스님은 지팡이가 바쁘구나
放牧園中牛帶影(방목원중우대영) 소먹이는 풀밭에 소 그림자가 늘어지고
望夫臺上妾低환(망부대상첩저환) 남편 기다리는 대에 아내 쪽진머리 낮더라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 푸른 연기 쌓인 고목은 시내 남쪽 길에 있고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짧은 머리 초동이 피리 불며 돌아오네
과거장에서 박문수는 미련의 마지막 구 7자가 떠오르지 않아 애를 태우다가 문득 7자를 지었다. 그것이 “단발초동농적환(短髮樵童弄笛還)”의 명구이다. 정말 설화 같은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지금도 안성 칠장사에는 해마다 사법시험이나, 입시 관련자 부모님은 “조청(엿기름)으로 만든 과자 공양을 올리면 영지(靈智)를 얻는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한 기도와 공양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어사는 조상 덕을 받았기에 강직한 인물로 그의 명성이 세상에 빛났다. 그러나 조상의 어느 명당에서 지기를 받아 높은 관직에 등용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다만 부모 불심의 공덕과 한양 가는 과거 길에 칠장사 나한전에서 꾼 몽제(夢題)로 인생이 급변했다는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어사 박문수는 정치성이 강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서민의 애환을 먼저 걱정하고 해결하는 정신이 누구보다 앞섰기에 백성의 존경을 흠뻑 받았다.
새로 출발하는 제22대 신임 국회의원에게 당부하고 싶다. “어사 박문수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정신을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곡성신문 gssm1999@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