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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에서 명당 중에 ‘물명당’이 있다. 대부분은 지관들은 물 가운데 결혈(結穴)이 된 곳을 ‘물명당’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풍수 역사에서 명당의 대가라고 하는 지사(地師)들이 등장하는데, 일찍이 물 명당을 잡았다는 지사는 아직 듣지 못했다.
다만 신라시대 바닷속 무덤인 문무대왕 수중릉(경주 봉길해수욕장 맞은편 위치)이 있지만, 역사서에 화장한 유골을 뿌린 산골처인지, 유골함과 부장품이 들어있는 수중릉인지 정확히 기록이 없다.
당시 유명한 일관(日官: 길흉을 점치던 관료)이 관여하여 결정했겠지만, 삼국시대는 풍수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명당이냐 흉당이냐’의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이다.
중국 쌍둥이 형제인 서선계(徐善繼)와 서선술(徐善述)이 지은 인자수지(人子須知)에 ‘물명당’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장자미(張子微) 지사는 “수교혈(水巧穴)은 수중으로 행용하는 용맥이 열리는 곳을 보아야 하는데, 갑자기 출현하거나, 숨기도 하여 점혈하기 어렵다”고 했다. 또 료씨(了氏)는 “혈(穴)이 수중에 있다고 하는 것은 사반(四畔)이 모두 물(水)일 때를 말하며 산부(山阜) 위에 결혈하고, 사면이 왕양한 호택(湖澤)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이며, 수중혈(水中穴)과 수저혈(水底穴)과는 다르다”라고 했다.
사람이 산을 버리고 수중혈이든 수저혈이든 아무리 좋은 물 명당에 매장, 이장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지사가 헤엄치고 물속에 들어가 명당의 유무를 점지할 것이며, 가령 점지했다 하더라도 물속을 어떻게 굴토하여 매장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물명당은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물명당(水中穴)’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농경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댐, 저수지 등 제방 공사하면서 묘지가 수몰될 위기에 있을 때 수몰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례로 전북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저수지에 ‘물명당’이 있는데, 이 저수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 때 독일인의 설계로 만들어진 저수지로서 절대용수량이 적어 고산면 소향리에 새로운 댐을 약 7년 동안의 공사하여 1989년에 준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낙도 전 의원의 5대 조부가 이곳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물명당’이 된 것이다. 최씨 집안 보첩(譜牒)에 “묘에 수위가 상승하여 물에 적시게 되면 삼(3)정승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장을 접고 저수지가 완성되었는데, 실제로 후손 중에 국회의원 3명이 배출되었다. 그래서 이곳이 ‘수중명당’이라고 은연중에 알려져 있다.
중국 명지관 사자기(謝子期)는 “수중으로 뻗은 용맥이 기이하므로 찾으려면 맥(脈)이 숨어버려 수중의 점혈은 도안(道眼)이 아니고서 볼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일찍이 도인이 물속의 혜안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지사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이 모든 이치를 도통하려면 험난한 도야(陶冶)의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과학기술문명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명당론은 옛 유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안식처는 산뿐만 아니라 수중에도 있음을 깨우쳐 준다.
곡성신문 gssm1999@hanmail.net














